한세예스24홀딩스; 손학규의 발자취 - 인간 손학규의 재평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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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손학규-조영래-김근태

 

*1947년 교육자 집안의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남.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 홀로 된 어머니가 키움. 어머니로부터
사범학교 진학을 권유 받음.

*1965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한 손학규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함.

*1966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규탄시위로 이중 무기정학 처분. 이때 법대 조영래(인권변호사),
상대 김근태(전 열린우리당 의장)와 같이 운동하며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림.

*1969년 민주화운동 관련 1년 투옥, 4학년 때 군 입대 후 병장 제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후 소설가 황석영과 노동운동 시작. 구로공단의 전자회사와 목공장에
위장취업. 이후 도시산업선교회의 박형규 목사와 함께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운동 전개. 수배자로
2년간 도피생활. 원주농장에서 막노동.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의 철공소에서는 용접 일을 함.

*대학교 3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이윤영과 7년 연애 끝에 결혼. 수배 중 모친 장례식에서 체포됨.
사건종결 후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지금의 NCCK)의 교회와 사회 위원회 간사 역임.

*1979년 부마항쟁 진상조사시 마산시에서 계엄사령부에 체포되어 김해보안대에 수감. 이틀간 취조
없이 구타로 사망 직전에 이르렀다가 박정희 사망으로 풀려남.

*1980년 영국 유학 중 '부천 성고문 사건' 자료집인 <우리의 딸 권양> 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각종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을 재개.

*1988년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그 후 인하대 서강대 정치학 교수 역임

*재야의 대표적인 인사였던 손학규는 1993년에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 제14대 총선 보궐
선거를 통하여 경기도 광명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제15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 1996년 제33대 보건
복지부 장관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최연소 장관 기록. 1997년 8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역임한
손학규는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3선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2002년에 경기도지사가 되었다.

*2001년 백봉신사상을 3선 이상 의원으로는 최초 2년 연속 수상.

*2007년 3월 19일 한나라당과 결별하고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는데 역할을 하였으나, 대통합민주신
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정동영에게 패하며 낙선하였다. 이후 대표직을 사임하면서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는 말을 남기고 강원도 춘천으로 떠났다.

*2010년 10월 3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반성과 무
상 복지를 내용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의 새로운 노선을 제시하고 당대표로 재선출되었다.

*2011년 4월 27일 재보선에서 한나라당 텃밭이었던 분당 을에 민주당 대표로 출마해 당선. 정치적 명운
을 걸고 던진 승부수가 적중함.

 

 손학규님의 젊은시절 이력으로 볼때, 그가 개인의 안위와 영달은 뒤로하고, 궁극에는 생명까지도 담보할수

없는 어두운 미래를 대면한 시대적 상황하에서도, 불의와 독재와 맞서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약자들의 삶속

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서, 세상을 바꿔보고자 몸으로 치열하게 실천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분이야 말로 립서비스의 소통이 아닌, 몸으로 소통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것이고, 당신이 가진 모든것을 던져서라도, 부정부패에 도전하는 열정을 가진분이기에, 정의와 공정도 얘기할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개인의 부귀영화만 꿈꾸며, 세상이 뒤집어지든 말든 고시공부에만 매달려, 남들보다 일찍 입신양명한 이들이 손학규님을 이렇다 저렇다하는 것은 너무나도 염치없다 아니할 수 없고, 우리가 만끽하는 표현의 자유등의 민주주의도 손학규님 같은 분들에게 빚진것이니, 그동안 그 은혜잊고 지내온 우리들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12월 30일 차가운 새벽에 소중한 한분을 또 떠나 보냈습니다. '민주화의 대부'로 불리던 김근태님! 우리들은 늘 곁에 있어 그 가치를 망각하다, 그 존재가 사라지고 나서, 그때서야 안타까워하는 우를 너무도 자주 범합니다. 그런 어리석음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위해서라도, 손학규님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새겨볼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