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도 버릴 만큼 소중한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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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 The Fact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2월18일 목요일 오전,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1800부의 반나찌 전단을 몰래 뿌리던 숄 남매가 게쉬타포에게 체포되었다.
대학 건물 곳곳에 전단 살포 후 귀가를 서두르는 순간 대학 수위 야콥 슈미트에게 발각되어 게슈타포에게 넘겨졌다.
게쉬타포 본부로 이송된 숄 남매는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나찌 저항운동단체 백장미단의 핵심멤버임이 탄로났고,
곧바로 숄 남매와 연루된 또다른 핵심멤버 크리스토프 프로프스트가 전격 체포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5일 후 2월 22일 오전,
이른바 시민재판으로 명명된 나찌법정은 반국가 반역행위로 이들 3명에게 사형을 언도하였고,
그날 오후 교도소로 이송된 이들 3명은 4평 남짓의 사형실에서 길로틴에 의해 차례로 목이 떨어졌다.
그들의 더운 숨결이 잘려 양동이로 떨어지는 데는 사형실 문에 들어선 직후 평균 8초의 시간이 전부였다.
 
체포에서 심문, 재판, 그리고 전격적인 사형집행까지 단 5일 만에 종결된 이 사건은 
당시 독일법정이 정한 사형언도 후 최소 99일 간은 사형집행을 금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역사는 이 사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943년 2월 18일 한스 숄과 소피 숄 남매는 히틀러의 전쟁 야욕과 나찌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전단을 뮌헨 대학에서 뿌리다가 체포되었는데, 그들은 ‘백장미단(Die Weiße Rose)’이라는
학생운동 조직의 일원으로 이미 수차례 반나찌 전단을 배포한 전력이 있었으며, 그들은 게슈타포에 의해 심문을 받고
불과 4일 후인 1943년 2월 22일, 독일 시민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같은 날 참수형에 처해졌다."

 


목숨도 버릴 만큼 소중한 가치 
폭력의 창살은 지성을 가둘 수는 있을지라도 양심을 가두지는 못한다.
숄 자매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것은 바로 인간다움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폭력의 광기에 얼어붙은 허약한 지성이 목숨을 구걸하며 고통스럽게 침묵할때, 저 잘못된 세상을 향해 양심을 절규한 것이며,

햇살과 바람이 또렷한 백주대낮에 인류의 심장을 난도질 한 저 씻을 수 없는 허위와 비양심의 범죄를 죽음으로써 고발한 것이다.

 

생각할 자유와 말할 자유를 천명하는 숄 자매의 단호한 신념적 태도의 근원은 뜨거운 양심에서 비롯됐다.
게쉬타포와 독일법정이 삶과 죽음의 양자택일을 놓고 이념의 변절을 흥정했을때, 숄 자매는 단호하게 목숨을 내 놓았다. 
이미 회복불능으로 치달은 조국의 치욕스런 광기가 짐스러워 부질없는 남은 생을 단두대에 저버린 젊음의 특권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숄 자매에겐 목숨 보다도 귀중한 지켜야 할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세월에 녹슬지 않는 것이 없다

인간다움의 최후 보루인 양심마저도  모호한 회색으로 변질시키는 것이 세월의 무서움이다. 
일상에서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세월에 찌든 녹슨 양심은 허위와 비양심에 습관적으로 길들여지고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일상의 허위와 비양심에 대한 균형감각이 치명적으로 결핍되어가는 현상에 무감각해지는 일이다.
종종 연륜이란 이름으로 균형점을 상실한 허위와 비양심이 중용과 지혜로 포장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 세상에 비겁한 양심처럼 추한 것은 없다.
쟈끄리느는 세월에 녹슨 누이좋고 매부좋고의 흐리멍텅한 끈적거림을 질색한다.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을 타협한 흐릿한 끈적거림이 중용으로, 그리고 저 잘못된 중용이 포용을 인내한 지혜로 포장되는 현실.
삼라만상의 무구한 세월에서 찰나에 지나지 않는 짧은 삶에 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우겨넣어야 하는 것인가.
전광석화의 삶에서 빗나간 양심을 물타기한 중용과 지혜 만큼 소모적인 것은 없다.

 

진심으로 바라건데, 이 곳에서 시황의 질을 떠나서 양심을 가두는 일 만큼은 없어야 한다.
갓 잡아올린 생선의 번뜩이는 비늘처럼 싱싱한 열정의 젊은 양심이 이 곳에 가득차길 진정으로 희망한다.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어...(Die Sonne scheint noch...)
소피 숄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회한의 순간에서도 오빠 한스 숄의 눈을 바라보며 마지막 희망을 위로했다.
그녀의 저 비극적인 저항의 기록이 그토록 눈물겨운 것은, 죽음의 순간에서조차 삶의 아름다움을 응시하는 태도이다.
예컨데, 죽음앞에서도 끈을 놓지 않는 저 희망의 태도는 인간다움의 마지막 양심에서 비롯된 순백의 카타르시스라고 믿는다.
-쟈끄리느 일기 中에서

 

 


팍스넷 쟈끄리느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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