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권의 책- 긍정의 배신

'

 

 

이 한권의 책 - 긍정의 배신

많은 책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그저 읽을 거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읽을거리 이상을 발견한 쟈끄리느는 다른 이도 읽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 글을 쓰기로 작정한다.

아래는 이 책에서 받은 인상을 확장해, 시황의 연계성에 개의치 않고 최근 금융위기의 이면에 촛점을 맞춰

나름대로 향후 궤적을 추적해 본 자유로운 사유의 글이다.  

 

 

 

 

이 책은 마치 강박관념 처럼 "긍정적인 사고"에 인간정신을 엿바꿔 먹는 현대인들의 잘못된 몰입을 경고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예술, 철학 등 인문학의 경계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넓게 퍼져 있는 저 긍정의 폐해.

그것은 미리 작성된 판결문으로 긍정의 반대편을 심판하는 단방향의 종교재판 처럼,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현대인의 인간정신을

일방으로 세뇌시켜 왔는데, 이 책의 저자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는 저 새로운 종교를 "긍정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한다.

 

인류 사상사에서 이데올로기는 종교의 그것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 왔다.

비판의 여지없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 이데올로기에 마취되는 그 순간 인간정신은 언제나 큰 위기를 맞았다.

인간정신이 신탁의 노예를 자처했던 중세가 그랬고, 헤겔좌파에서 태동되어 근현대사를 피로 물들인 막시즘의 종교가 그랬으며,

현 지구촌 전체에 "버블만능"의 깃발을 휘날리며 소리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식 시장자본주의의 종교가 그렇다.

애런라이크는 저 긍정의 이데올로기가 탐욕의 미국식 시장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유지하는 수단으로 작용했으며,

시장자본주의 순환과정 중 필연적인 버블 붕괴의 위험성으로 부터 눈과 귀를 멀게하는 포르말린 역할을 해 왔다고 진단한다.

 

자본주의 성장의 이면에는 빈민들의 불행과 금권의 잔혹한 억압이 숨겨져 있다.

지난 1세기 미국식 시장자본주의의 성장 배경 또한 금권으로 조작된 빈부격차의 확대로 요약된다.
화려한 팍스아메리카에서 사실상의 토대구조는 시장권력이 허락된 소수와 불평등에 익숙한 대다수의 빈민으로 채워져 있다.

어차피 자본주의 질서의 핵은 불평등이고, 저 공고한 질서를 깨뜨릴 가능한 픽션은 불평등이 야기할 체제전복의 위험이 유일한데,

그같은 반란의 시도들을 능숙한 억압으로 원천봉쇄 하는 것, 그것이 현재 글로벌 G-20 시장자본경찰국가 권력의 최우선 임무이다.

 

어째서 자본주의 성장은 끊임없는 빈부격차 확대의 일방통행 일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빈부격차의 확대가 사회의 긴장을 높이기 때문인데, 부의 재편성을 위한 사회계급 간 이전투구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만일 부의 편중이 만든 사회계급 간 이전투구의 격렬한 사회적 긴장이 사라진다면, 자본주의 생명은 사실상 끝난 것이다.

때문에 빈부격차의 확대에 의한 사회적 긴장 고조는 곧 자본주의체제와 권력의 생명유지장치와도 같은 것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권력은 빈부격차의 확대를 "체제를 유지하는 필연의 필요악"으로 적극적으로 용인하고 장려하는 것이다.

 

부와 관련된 계층 간 갈등과 그로 인한 사회적 긴장의 레벨이 높아질수록 자본주의의 성장동력은 강해진다.

팍스아메리카로 대표되는 후기현대 자본주의의 성장의 모델 또한 저 빈부격차의 확대를 향한 사회적 긴장의 지속적인 팽창이 있었다.

빈부의 끊임없는 이전투구의 조장으로 사회적 긴장의 지속적인 팽창을 도모하는 일은 고도의 기술들이 동원된다.

"긍정의 철학"은 그와같이 빈부격차의 확대 재생산으로 성장동력을 충전하는 국가권력이 대중을 선동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막강한 자본력과 정치적 영향력으로 미국 사회에서 하나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는 기독교는 번영신학을 통해서,

또 자국은 물론 제3세계에서 억압과 수탈의 히스토리로 막강한 부를 축적한 글로벌 거대 기업들을 통해서,

그리고 사회 각계각층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오피리언 리더 그룹을 통해서, 새로운 미국식 종교 긍정의 철학은

현단계 후기산업사회를 빠르게 물들이면서 체제에 복종하는 기술지침 "긍정적 사고"를 전방위로 세뇌시켰다.

 

그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고도로 불평등한 이 미국식 지구촌은 전혀 문제가 없으며,

빈부는 다만 당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방향이 결정되는 순전히 당신이 책임져야 할 결과라는 것.

때문에, 가난은 철저하게 당신 탓이니 좀더 나아지기 위한 긍정의 삶을 희망하고 노력하면 부자의 삶을 가질 수 있다고 설득한다.

"모든 게 내 탓이오.. 그러니 기도하고 희망하라, 마침내 이룰지니".. 이것이 이율배반의 미국식 신종교 긍정철학의 본질이다.

설사 지구가 반쪽이 난들, 부가 편중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의 문제라는 "불가항력의 절대적 절망"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유수의 석학들이 저 치유불능의 비관적 진실을 초록동색으로 서술했던 반면, 에런라이크는 한 발 더 나아가

저 비관의 진실을 은폐하는 국가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정의하고, 그것이 어떻게 메시아의 음성으로 지구촌을 길들이고

군림할 수 있었는지를 명쾌하게 까발리고 있다.

 

 

 

후기산업사회가 가속화 될수록 자본의 불평등은 더욱 비등하는 추세이다

차면 넘치고(버블의 팽창-붕괴), 넘치면 비우고(버블의 소멸), 비우면 채우는(버블의 생성) 순환과정은 자본주의의 숙명이다.

그러나 탐욕의 미 자본주의는 체제 전반에 전방위적인 "긍정"의 세뇌를 통해서 저 버블의 순환과정 중 "붕괴"를 도려내 은폐했다.

아시다시피, 저 은폐의 결과는 2008년 미 금융 모럴헤저드의 초대형 버블, 리먼의 지렛대를 부러뜨리는 참담함으로 이어졌다.

 

2008년 지구촌에 불어닥친 위기를 단순히 불황이라고 부르지 않고 금융위기라고 특정해 부르는 것은 시대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교통, 정보, 통신의 3대 트로이카체제로 빠르게 이행된 후기산업시대에서 실물경제의 전방위적 불황은 사실상 구시대의 유물이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 당시와 최근 금융위기를 겪은 지구촌은 시공간의 지리적 거리에서 엄청난 물리적 괴리가 존재한다.

1930년 당시의 열악한 정보 통신과 열악한 교통은 불가항력의 정보의 비대칭과 극복하기 힘든 지리적 시공간이 벽처럼 존재하던

시기였으며, 거기에 이데올로기의 절벽이 더해져 그야말로 요즘처럼 최선의 국제공조 따위는 상상조차 힘든 시기였다.

때문에, 수요와 공급의 시스템에 이상이 생긴 미 자본주의에 구멍이 뚫리면서 이 충격은 적지않은 시간차를 두며

서서히 도미노식으로 지구촌 실물을 야금야금 타격하면서 오랫동안 지구촌을 불황의 늪으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현단계 최첨단으로 진화한 전광석화의 3대 트로이카 시대에서 지리적 시공간의 괴리에 의한 정보의 비대칭과

시공간적 딜레이는 더 이상의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정보의 비대칭 속에서 지리적 시공간과의 지리한 싸움, 그것이 저 까마득한 1930년대 불황의 흑백 다큐멘터리 필름의 배경이다.

하지만, 2008년의 금융위기는 글자 그대로 실물(펀더멘털)의 붕괴와는 상관없는 미 제국주의 최첨단 금융공학이 자폭한 것인데,

만일 2008년 금융위기가 1930년대의 대공황과 같이 전통적인 펀더멘털의 직접 타격을 지시한 것이었다면,

단 3년여 만에 정상적인 궤도를 되찾은 현재의 글로벌 경제는 그야말로 꿈도 못 꾸었을 일인데, 그러므로 2008년 금융위기는

실물에의 충격을 최소한으로 비껴간 금세기 최대의 금융사고 내지는 금융사기라고 정의내리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불황의 해법도 진화한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역사가 증거하듯 자본주의는 같은 실수를 리바이벌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버블의 생로병사에 의한 순환고리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생명을 이어간다.

버블의 마지막은 언제나 참담한 불황이었는데, 불황을 수습하고 새로운 버블의 불씨는 지피는 방식은 시대마다 달랐다.

1930년대 지구촌을 엄습한 대공황을 수습한 루즈벨트의 "뉴딜"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실물에 기반한 전통의 "삽질"이었다.

월남전으로 국고를 탕진해 달러화 위기에 빠진 미국을 불황 직전에서 건져 낸 것은 총잡이 닉슨의 이른바 '닉슨쇼크'였는데,

닉슨은 저 전통의 힘든 삽질의 악몽이 떠오르는 것도 싫었겠지만,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대통령의 레떼르는 죽기 보다 싫었을 것이다.

 

어떻든 닉슨은 나락으로 나뒹굴 운명에 처한 달러를 역사상 듣보잡의 "금태환금지선언"의 마술로

극적인 전화위복의 전기를 마련했는데, 닉슨쇼크는 그 당시에는 좁은 의미의 "달러 강매"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지구촌에 달러 윤전기의 고속화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역사적 대사건이었으며, 이것은 결정적으로 현단계 허상의 레버리지를

용인하는 금융공학의 돌연변이 괴물을 탄생시켰다.

단 한번의 휘청임으로 현대 시장자본주의의 생태계를 흔들어 버릴 수 있을만큼 강력한 최상위 포식자가 생겨난 것.

결과야 어떻든 리먼사태는 현란한 진화와 변이로 결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미국식 자본주의 역사의 최종 진화체였으며,

"긍정의 철학" 이데올로기 프로그램으로 국가권력의 보호를 받는 최상위 포식자 그룹의 일원이었다.

 

이 한권의 책에서 쟈끄리느가 읽어 낸 것은 긍정의 종교가 가져 온 미국식 시장자본주의의에 대한 비관적 메세지가 아니다.

쟈끄리느는 오히려 적어도 금세기 안에는 팍스아메리카의 철옹성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만을 재 확인했을 뿐이다.

이따끔씩 긍정을 뒤덮는 비관의 자잘한 현상들 위로 또다시 거대한 긍정이 덮여지며 지구촌 궤적은 우상향을 그려왔다.

미 시장자본주의에 비관적인 이 책은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러한 확신을 정확하게 부정하지 못한다.

 

 

 

"이성(理性)의 산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온통 미친사람 투성이다"

괴테는 어떤 이데올로기라도 결코 올바른 세상을 만들지 못하며, 본질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곳이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성의 눈으로 보면 "팍스아메리카의 미친 모럴헤저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며, 결코 존재해서는 안되는 사탄과도 같다.

그러나, 호혜평등한 상식적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미국식 시장자본주의의 모습이며,

그 이해불가의 변화무쌍한 변이와 진화가 바로 미국식 시장자본주의의 진정한 힘인 것이다.

 

이 세상에 멸종하지 않을 생물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박테리아 일 것인데,

현대의학의 눈부신 성장에도 결코 정복하지 못하는 박테리아의 힘의 원천은 똑같은 약물에 두 번 죽지않는 놀라운 변이능력에 있다.

어제, 오늘, 혹은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폐색이 짙은 미국식 자본주의는 흡사 박테리아를 닮아 있다.

닉슨쇼크 이후 고속 윤전기의 푸른 잉크에 감염된 금융공학의 자가중독은 매순간이 치명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기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팍스아메리카는 감탄할 임기응변의 진화로 새로운 변이체로 거듭났다.

3년 전 금융공학의 모럴헤저드에서 생겨난 리먼이라 불리는 악성종양으로 사실상의 시한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저 특유의 전매특허 끈질긴 슈퍼박테리아의 변이는 결국 암흑에서 장미빛을 틔워냈다.

암세포를 긁어내느라 깔려 죽을 만큼의 달러를 찍어내고서도 후안무치의 뻔뻔함을 오히려 메시아의 구원으로 변이 시키는 능력.

저 비상식의 놀라운 장면의 이면과 정점에는 언제나 애런라이크의 "긍정의 이데올로기"가 휘날레를 장식했다.

 

 

 

"긍정의 이데올로기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배신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애런라이크가 말하는 돌이킬 수 없는 저 순간이 언젠가는 오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그가 살아 생전에는 아닐 것이다.

이미 슈퍼박테리아 금융자본에 참혹하게 길들여진 지구촌은 저 예정된 결말을 향해 가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저 결말을 예측하기에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변화무쌍한 둔갑술을 그 누구도 감히 어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갈때까지 가보자는 마인드로 찍어내기 시작한 1차, 2차의 양적완화.. 3차는 왜 아니겠는가.

망국적이든 아니든, 현단계 지구촌 궤적의 모든 키를 쥐고 있는 맏형 미국이 기차바퀴를 네모라고 말한다면 실제로 네모진 것이다.

일개 개미인 우리가 제 아무리 동그랗다고 우기고, 네모진 건 사기장이라고 떠들어도 시장은 간다.

사실이지, 우리가 저 "긍정의 이데올로기"가 왜 생겨났는지, 대체 그것의 속내는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다.

다만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으면 그만인 것이다.

 

적어도 아주 먼 미래일 것이니, 긍정의 이데올로기에 배신 당할 것을 미리 걱정해 호들갑 떨지 말자.

저 배반의 칼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혹시 몰라 당신이 손가락을 빠는 동안 시계는 돌고 긍정의 지구는 자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시장의 줄기를 모르면서 좌충우돌 부지런한 것, 그것은 죄악이다.

 

 

 




팍스넷 쟈끄리느님의 글입니다.
블로그주소 : http://blog.moneta.co.kr/blog.screen?blogId=alfactmem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