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보다 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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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몰아치는 한여름 밤, 필라델피아 외곽의 어느 허름한 호텔에서
현관 밖의 비바람 속에서 나타난  백발의 어느 노부부가 잔뜩 지친 표정으로 룸이 있느냐고 물었다.
때마침 필라델피아에서는 대규모 회의가 세개나 겹쳐서 열리고 있었으므로.
벌써 며칠째 시내 호텔은 물론 이 변두리 호텔도 다르지 않음을 짐작하고 있는.

 

죄송합니다. 안됐지만, 만원이라 방이 없습니다.
역시나 낭패스러운 지배인의 대답에 노부부는 다시 현관을 나서며 비바람 속으로 돌아서야 했는데.

 

잠깐 기다리세요.
이런 비바람 속에 차마 두분을 그냥 보내드릴 수가 없군요.
누추한 제 방이라도 괜찮다면 주무시고 가셨으면 합니다. 제 염려는 하지 마시구요.
저는 긴 의자 하나면 아무데서나 골아 떨어집니다. 하하

 

다음날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지배인에게 노인은 숙박료와 함께 작은 쪽지를 꼭 쥐어줬다.
 

정말 고마웠소. 젊은이.
간밤에 빗속을 헤메던 우리 부부는 지상 최고의 잠자리에 들면서 약속을 하나 했어요.
뉴욕으로 돌아가면, 미국에서 제일 큰 호텔을 짓기로.
그리고, 호텔을 지으면 당신처럼 친절한 사람이 지배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쪽지에는 정갈한 필치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어느날.
여전히 그 허름한 호텔에 몸담고 있는 지배인에게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뉴욕행 특등석 왕복 항공권이 함께 동봉된 편지에는, 폭풍이 불던 한여름밤 그날의 지배인이 맞다면
뉴욕에서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꼭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벌써 잊은지 오래여서.
4년전 어렴풋한 노부부의 인자한 인상만을 간신히 더듬어 낸 지배인은
뉴욕 공항에 마중나온 노부부를 단박에 알아 볼 수 있었는데, 잠시 후 노부부가 그를 안내 한 곳은 
뉴욕 5번가와 34번가가 엇갈리는 교차로 모퉁이였다.
 
대체 이렇게 멋질 수가 있는가.
모퉁이 한켠으로 크고 멋진 빌딩이 구름위로 치솟아 있었고
붉은 돌을 깎아서 지은 빌딩의 자태는 궁전같이 화려하기 그지 없었는데.
뉴욕 시가지를 제압하고 있는 그 위풍당당한 빌딩을 가르키며 노인은 지배인에게 말했다.

 

4년전 내가 약속했던 호텔이오. 당신에게 맡기겠소.

노인의 이름은 윌리엄 와돌프 아스토어였고, 그 호텔은 뉴욕 최고의 와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이었다.

 

친절이란 그런 것이다.
그저 잊어도 좋을 상대방에 대한 아주 사소한 배려에서 출발한.
그러나, 어느날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큰 감동으로 종종 맞딱뜨려 오는 것.
단 한줄의 댓글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면, 그 정갈함만으로도 상대에게 가볍지 않을 것이며,
각박한 이곳에서 외돌프의 그것처럼 소중한 인연의 끈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를 것이니.
   
경험적으로,
황금을 얻는 일은 무언가를 희생한 댓가가 아니라, 무언가를 나눠 준 댓가가 더 가치있고 컷다.
이곳에서 누군가를 배려하는 일처럼 쉬운 일은 없다.
단 한줄의 댓글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