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해회사포말사건 세계투기의 3대 버블



남해회사포말사건

南海會社泡沫事件

South Sea Bubble

1720년 영국에서 수많은 투자가들을 파산시킨 투기사건.

이 사기사건은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의 사업운세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이 회사는 당시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끝나면 스페인령 아메리카와의 노예무역을 허용해주는 조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추측하에 스페인령 아메리카와의 노예무역을 목적으로 1711년에 설립되었다. 6%의 이자가 보장된 이 회사의 주식은 잘 팔렸지만, 당면한 평화조약이었던 1713년 스페인과 맺은 위트레흐트 조약이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남해회사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즉 이 조약에 따라 수입노예에 대해 매년 세금을 납부해야 하고, 남해회사는 일반무역을 위해 1년에 단 1차례만 선박을 보내는 것이 허용되었다. 1717년 남해회사의 첫번째 무역항해는 보통수준의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1718년 영국 왕 조지 1세가 이 회사의 관리자가 되면서 사업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주게 되자 남해회사의 주식은 곧 100%의 이자를 배당하게 되었다.

1720년 남해회사가 의회의 승인을 얻어 국채인수를 제의하면서 이 회사 주식에 대한 인기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치솟았다. 남해회사는 무역을 확대하고, 주가가 상승하면 국가채무를 갚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주식값이 극적으로 상승했는데 1720년 1월 128.5이던 것이 그해 1,000 이상으로 폭등했다. 이 회사 주식을 살 만한 여유가 없던 사람들도 무턱대고 낙관하고 있던 이 회사 발기인들과 사기꾼들의 부추김으로 분별없는 투자를 했다. 같은 해 9월 시장이 붕괴되면서 12월에 남해회사의 주가가 124로 폭락했으며, 이와 함께 국채를 포함해 남해회사 주식과 관련된 다른 주식의 가격도 덩달아 떨어졌다. 많은 투자가들이 파산했으며 하원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착수를 명령했고, 그 결과 최소한 3명의 장관들이 뇌물을 받고 투기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회사 중역들 중 다수가 해직되었으며, 1750년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권리를 스페인 정부에 매각했으나 남해회사는 1853년까지 존속했다.



17세기말, 당시에는 주식을 소유하는 것이 일종의 특권으로 여겨졌다. 그 유명한 동인도회사의 주주가 500명이 채 안되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수의 주주들이 받는 배당은 비과세였고, 더구나 주식은 영국 여성들이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자산이었다. 주식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날로 커져갔고, ‘남해회사는 투자자의 전폭적인 신뢰속에 1711년에 설립되었다.

  시작부터 대담했던 남해회사는 거의 1천만 파운드에 달하는 정부채무를 인수하는 대신, 그 보상으로 남태평양 모든 무역의 독점권을 인정받게 된다. 대중은 이 사실만으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사실 남해회사는 정부 채무를 인수하면서 정부증권을 자기회사 주식으로 교환해 주었다. 이 내부정보를 미리 알았던 이들은 55 파운드에 팔리던 정부증권을 사 모았다가 회사가 설립된 후에 시가 100파운드짜리 남해회사 주식과 맞바꾸었다.

  남해회사 임원들은 무역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대중에게 홍보하는 능력은 탁월했다. 한 역사가는 남해회사의 홍보책임자에 대해 이렇게 썼다. “ 그는 항상 오른손에는 기도 책을, 왼손에는 사업설명서를 들고 살았으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절대로 알지 못하게 했다

  남해회사는 연이은 사업실패에도 계속해서 가격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완만히 오르는 기현상까지 낳았다.

  같은 시기에 영국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망명한 영국인이 미시시피 컴퍼니를 설립한다. 이 회사의 사업계획은 국가가 보증하고 유동성 높은 지폐를 만들어 금속화폐를 대체하는 일이었다. 미시시피 컴퍼니는 이를 위해 사상 최대의 자본규모를 자랑하는 복합기업으로 확장을 하게 된다. 유럽전역의 막대한 투자자금을 끌어 모았고 백만장자라는 단어가 이 때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오를 만한 논리적인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주가는 급등하였고, 시가총액은 프랑스 전체의 금과 은의 가치보다 8배가 많았다고 한다

한 편 영국에서는 일부 귀족을 중심으로 일종의 맹목적인 애국주의가 일고 있었다. 왜 모든 자금이 영국으로 가야하는가? 이 물음의 해답은 남해회사였다.

  남해회사는 이러한 분위기에 화답하듯, 1720년 국가채무 전액을 상환하겠다며 자본을 증액하기로 발표한다. 대중은 크게 환호하였고 너도나도 신주를 사려고 몰려들었다. 신주 매입조건은 매우 파격적인 것으로, 할부로 나누어 매입할 수 있었다. 국왕조차 이런 매력적인 조건을 거절할 수 없었다.

대중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았다. 남해회사는 더 높은 가격에 신주를 추가 발행한다고 발표한다. 추가발행은 이전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였고,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130 파운드였던 주가는 수개월만에 1000 파운드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사기공모도 줄을 이었다. 대중은 아무 주식이나 사려고만 했지, 무슨 사업인지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터무니 없는 프로젝트는 100여개에 달했고, 그 중에는 엄청난 이득을 올리는 사업이지만, 그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는 회사까지 설립되어 5시간만에 설립자는 투자금을 가지고 대륙을 떠났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들은 곧 거품으로 불리게 되었고, 거품처럼 금방 터졌다. 대략 1주일이었을 뿐이다.

  남해회사 거품으로 피해입은 대중에는 아이작 뉴턴도 있었는데 그는 나는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대중의 광기는 계산할 수가 없다라고 한탄했다한다.

  남해회사의 붕괴는 회사내부에서 단초를 제공하였다. 회사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갖게된 임원과 직원들은 주식을 모두 조용히 팔아버렸고, 곧 이러한 소식이 시장에 퍼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공황이 발생했다. 정부는 사태를 해결하려 했지만, 한 번 무너진 신뢰는 돌이킬 수 없었다. 바다 건너 프랑스의 미시시피 컴퍼니도 붕괴되었다. 국회는 대중의 피해확산을 막기위해 기업들의 주식발행을 금지하는 거품법을 통과시켰고, 이후 한 세기가 넘도록 영국에서 주식증서를 찾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