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시피 버블- 존 로(화폐의 아버지)



작전의 주역인 존 로우는 1671년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유학했다. 그는 사람을 죽인 죄로 투옥됐으나, 가까스로 유럽 대륙으로
탈출한다.

1716년 그는 프랑스의 일반금융법에 기초하여 은행권을 발행하고 또
정부가 세금을 이 은행권으로 낼수있게 승인함으로서 성공적인 출발을하며
루이15세가 부임한직후 왕실의 빛을 대납하는 조건으로 왕립은행의
설립권을 받아내는 행운까지 누린다.

이후 그는 왕립은행계열의 미시시피회사의 주식양도거래특권에 응찰
주식회사로 전환시킨다. 최초의 액면가는 500리브르였다.(1718)

그는 우선 회사의 주식을 단기재정 증권과 교환하여 마치 정부에서 출자한것
같이 꾸몄다. 이후에 신주를 5만주 발행하면서 그자신이 90%인수하여 주식발행에
성공한다. 곧 정부의 신용을 업고 존로우의 회사가 되어 버린것이다.

그는 12%의 배당을 약속하며 3달사이에 7배 폭등시키며 다시 5만주의 신주를 발행하여
그자본으로 M&A를 계속한다.

이렇게 생긴 신용도를 바탕으로 국제징수권을 인용 받는 대신 신주로 정부에
대가를 지불하기로하고 그 구실로 다시 액면가 500리브르에 불과한 주식을
5000리브르에 10만주나 발행한다. 이후로 2번이나 성공적으로 주식 발행에 성공한다.(9월)

이쯤되자 존로우라는 이름자체가 대박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고
그의 의도대로 동조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미시시피회사의 독점개발권이 있는
루이지애나에 금이 묻혀있다는 소문까지 가세했다.

10월쯤에는 주가가 6500리브르로 올랐고 11월말이 되자 1만리브르를 넘어서 버렸다.

여기서 그는 작전의 대가 답게 주가의 정점에서 투자자들에게 1000리브르의 예탁금을
내고 6개월후에 행사가격 1만리브르로 주식을 살수있는 주식 콜옵션을 팔았다.

그러나 비록 미시시피회사가 루이지애나의 독점 개발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당시 루이지애나의 경제전망은 형편없었다. 단지 신규회사를 설립하고
정부의 신용을 등에업고 신규사업의 독점 사업성을 무기로 주가 띄우기에
성공했던것이다. 결국은 외국자본의 이익이 실현되고 자금의 유출이 커짐에 따라(인플레이션)
이러한 폭등을 막을 내리고 존로우의 해외도피로 모든 사건은 종결된다. 



- 버블 경제의 역사 -

 

아주 오래전 BC 2세기 로마 사람들은 투기꾼을 '그라키'(Graeci)라고 불렀다. 그라키라는 말의 어원은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복 전쟁으로 번성했던 로마시대에 이미 지금같은 무역 환어음 결제에서부터 무역 위험을 헤지하는 다양한 파생상품들까 지 존재하였다. 정복지역에 대한 조세징수권에 대한 선물 상품이 존재하였으니 인류는 원래부터 투기를 좋아하였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러한 버블의 역사는 헬레니즘 시대에도 계속 이어져 헬레니즘 시대에 있던 경매장, 상품창고 등에서 지금의 주식같은 어음을 융통시켰고 BC 3세에 이르러서는 이런 투기자본의 금융화 자본화는 화폐로까지 옮아갔고 결국 이러한 통화팽창은 로마를 금권만능주의로 만들고 로마제국의 파멸에 이르게 했다. 


 

유럽의 튤립버블이 있다면 중국 당나라에는 모란 버블이 있었다.

 

"장안의 봄"을 저술한 이시다 미키노스케에 따르면 당시 중국 당나라 시대의 버블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지역 성주였던 이연과 그의 아들 이세민이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당나라를 열며 중국사회에 오랫만에 평화와 변영의 시기가 열리게 되었다. 전쟁이 없어지고 사회가 안정이 되자 당신 수도였던 장안의 부호와 귀족들은 그들의 정원을 장식할 아름다운 모란꽃 투기에 몰입했다. 늦은

봄이면 화려한 모란꽃 경연대회가 열렸고 1등을 받은 모란 가격은 집 한채를 훌쩍 뛰어 넘었다. 당시 밭과 논을 경작해야 할 농부들이 벼와 곡물이 아닌 모란재배에 열을 올렸다. 결국 이런 모란버블사태는 정부의 재정악화와 더불어 개입된 경작금지법에 의해

많은 부호들과 귀족 그리고 농민들을 지금의 파산에 이르게 했다.


 

지금의 서브프라임 위기는 프랑스판 미시시피 버블 사태의 재현

 

프랑스에서는 지금까지도 은행에 BANK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유일한 나라이다. 그들은 그 'BANK'라는 이름 대신에 'CREDIT'

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BANK라는 단어 자체를 혐오하고 있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은 금융업에 BANK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왜 프랑스에서만 유독 그 표현을 싫어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존 로라는 사람이 일으킨 미시시피 버블 때문이다.

 

- 프랑스 정부를 파탄나게 만든 장본인 존 로 -

 

  
1710년 프랑스 정부를 파탄나게 하였던 미시시피 버블의 주역 존 로는 1671년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경제공부를 하면서 그 당시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화폐의 금태환을 포기하고 토지를 담보로 화폐와 주식을 무한정 발행하여 부를 만들수 있는 생각을 실행에 옮긴 전무후무한 인물입니다. 당시 그의 주장은 이러했습니다. 유럽에서 주화로 사용하던 금속은 재고량이 떨어져 효용이 줄어들고 있었기에 그는 금속 주화 대신 지폐를 발행해 유통하는 지금의 경제 시스템을 최초로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로는 자신의 생각을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며 주창했으나 비웃음만 사며 그의 생각은 배척당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런 지폐의 유용성을 채택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였다. 당시 프랑스의 모든 의사결정권은 국왕의 섭정대신이었던 오를레앙 공작이 맡았었는데 루이14세의 사치와 전쟁으로 짊어진 국가 채무를 존 로의 생각을 빌어 인쇄기를 통해 지폐를 무한정 발행하여 청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1716년 그는 프랑스의 일반금융법에 기초하여 은행권을 발행하고 또 정부가 세금을 이 은행권으로 낼수있게 승인함으로서 성공적인 출발을 하며 루이15세가 부임한직후 왕실의 빛을 대납하는 조건으로 왕립은행의 설립권을 받아내는 행운까지 누립니다. 이 왕립은행의 이름이 바로 뱅크로열(Banque Royale)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왕립 은행계열의 미시시피회사의 주식양도거래특권에 응찰 이를 주식회사로 전환시켰고 이때 최초의 액면가는 500리브르였습니다.

그는 우선 회사의 주식을 단기재정 증권과 교환하여 마치 정부에서 출자한것 같이 꾸며 이후에 신주를 5만주 발행하면서 그자신이 90%인수하여 주식발행에 성공을 하며 자신의 회사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12%의 배당을 약속하며 석달사이에 주가를 7배 폭등시키며 다시 5만주의 신주를 발행하여 그 자본으로 지금의 M&A를 계속합니다.

이렇게 생긴 신용도를 바탕으로 국제징수권을 인용 받는 대신 신주로 정부에 대가를 지불하기로하고 그 구실로 다시 액면가 500리브르에 불과한 주식을 5000리브르에 10만주나 발행한다. 이후로 그는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주식 발행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에서 존 로는 이름자체가 대박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고 그의 의도대로 동조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미시시피회사의 독점개발권이 있는 루이지애나 지역에 금이 묻혀있다는 루머까지 돌기 시작했습니다. 10월쯤에는 주가가 6500리브르로 올랐고 11월말이 되자 1만리브르를 넘어서 버렸다. 여기서 그는 주가의 정점에서 투자자들에게 1000 리브르의 예탁금을 내고 6개월후에 행사가격 1만리브르로 주식을 살수있는 주식 콜옵션을 팔았다.

그러나 비록 미시시피회사가 루이지애나의 독점 개발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당시 루이지애나의 경제전망은 형편없었다. 단지 신규회사를 설립하고 정부의 신용을 등에 업고 신규사업의 독점 사업성을 무기로 주가 띄우기에 성공했던것입니다. 결국은 외국자본의 이익이 실현되고 자금의 유출이 커짐에 따라 이러한 폭등을 막을 내리고 존 로는 해외로 도피하여 부랑자 생활을 하다 삶을 마감하게 되며 프랑스 정부는 존 로의 뱅크로열 지폐 시스템을 도입해 프랑스 재정 파탄을 극복하게 되었지만 불과 얼마 못가서 미시시피사의 파산과 더불어 프랑스 사회는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함께 시민봉기의 계기가 되었으며 정부의 재정은 파탄나고 결국 왕조의 몰락을 가져오며 추락 길로 내몰렸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지금도 금융업에 BANK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