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바로사 작전

'

 

"제독!

오늘은 히틀러의 소련 침공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 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도록 하자꾸나!"

 

"바르바로사 작전이요?

저게 독일의 소련 침공작전인가요?"

 

"그렇지.

히틀러가 영국 상륙작전인 어이없는 '바다사자 작전' 을 시행하려다가 결국 '영국방공전' 에서 잘못된 작전이라는 것을 깨닫고 소련 침공을 준비한다.

전사를 읽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투 자체에서 승패의 결정적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잘못된 분석이지.

예컨데,

드디어 히틀러가 소련 침공을 위해서 준비를 시작하자 틈만나면 폴란드, 발트3국, 핀란드 등의 약한 나라들을 협박해서 땅을 빼앗던 스탈린도 히틀러를 두려워해서 전쟁을 피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지.

하지만,

소련이 당시 대부분의 군사력을 독소 국경으로 집결시켰다는 사실에서 스탈린 또한 전쟁의 불가피성을 알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사를 보면 스탈린이 전쟁 준비를 안했다느니, 히틀러의 공격을 방심했다느니 하는 등등 초기 소련군의 대패원인에 대한 갖가지 핑계를 대려고 한다.

전쟁의 위험이 없는데 대부분의 군대를 국경지역에 배치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지.

즉,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국경지대에서 독일군을 방어한 다음 오히려 역습을 계획했을 것이다."

 

"그럼 바르바로사 작전은 어떻게 되었나요?"

 

"아!

저것?

'스탈린의 실수' 덕분에 히틀러가 훨씬 유리한 전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프랑스 전역에서 그들의 '전격전' 의 효과를 인식했고,

그에 따라서 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초기 프랑스 전역에서 '덩케르크로 바로 진격할 것이냐? 아니면 측면 공격에 대한 대비를 할 것이냐?' 류의 의문없이 그대로 깊숙이 돌진해 들어가는 것이었지.

말 그대로 300 만명의 독일 군은 3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서 각각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에프' 로 향해서 무인지경으로 공격해 들어갈 수 있었다.

만일,

'히틀러의 실수' 만 없었다면 진짜 소련을 항복시킬 수 있을 정도였었지."

 

"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전격전' 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나요?"

 

"흠,

세상에는 뚫리지 않는 방어선은 없다고 하지 않았더냐!

여하튼,

독일이 첫 공세에서 소련군 방어선을 뚫고 나서는 마치 무인지경의 들판을 지나는 것 같았지.

소련군의 방어거점을 만나면 '칸나에전투' 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 방어거점이나 도시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닌 좌우로 갈라져서 포위해서 공격을 하곤 했었다.

어쨌던,

공격의 효율은 대단히 좋아서 그 전과는 상상할 수 없었지.

때문에,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공격보다 인상적인 군대는 수 백년 전의 '몽고기병' 외에는 없었다고 생각될 정도였었다.

독일군은 각각의 목표를 향해서 빠르게 진군을 계속 했는데 저러는 사이에 소련군 사이에서도 '스탈린의 실수' 였던 군 장교들에 대한 대숙청 이후 남아있던 장교들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쥬코프' 였지.

그는 레닌그라드 방어 책임을 맡아서 치밀한 방어거점을 마련해두므로써 독일 북부 집단군의 공격으로부터 끝끝내 레닌그라드를 방어해냈다.

그리고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격에 즈음에서는 모스크바 방어의 책임을 맡았을 때 스탈린에게 요구한 것이 있었지."

 

"뭔데요?

스탈린의 실수 가운데 하나였던 단 한뼘의 땅도 내주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갑부대의 강력한 공격을 단 한뼘의 후퇴도 없이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므로 어느 정도까지의 침투를 용인해주면 효율적으로 막겠다고 한 것이지.

물론,

저 때 쯤에는 스탈린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전투를 장군들에게 맡겨두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지.

하지만,

전사를 읽어보면 역시 많은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꼭 핑계를 찾아오는 경향이 강하더구나!

원래,

중부집단군은 쾌속으로 진격해서 모스크바 근처까지 갔었지만,

사실 다른 집단군들 또한 마찬가지였어!

북부 집단군 또한 아주 빠르게 진격했지만 목적지인 레닌그라드에서 막힌 셈이었고,

남부 집단군은 너무 빠르게 진격해서 목적지인 '키에프' 에 대규모 소련군을 포위한 채로 멀리 진격해버린 것이었지.

원래의 의도는 '키에프' 에서의 소련군이 항복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히틀러의 실수' 때문에 항복하지 않고 결사항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

자,

제독!

너같으면 수도라는 것 외에는 별 볼일이 없는 '모스크바' 를 공격하겠느냐?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살고있고,

유명한 곡창지대와 유전, 광물자원, 공업의 중심지 등등 원래 히틀러가 그 토록 꿈꾸던 독일이 번영을 위해서 꼭 확보해야할 땅으로 생각했었던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 를 점령해야 하겠느냐?"

 

"넵?

아니,

6. 25 때도 서울이 함락당했었지만 수도를 부산으로 옮겨서까지 계속 싸웠잖습니까?

수도를 점령하는 것은 상징성 외에는 별 것 아닐 것 같은데요?"

 

"그렇지.

히틀러는 저 선택의 기로에서 모스크바 공략을 추진중이던 '중부집단군' 에게 '키에프' 공략을 명령해서 65만명 이상의 포로를 확보하면서 드디어 함락시켰다.

그리고 다시 군대를 돌려서 모스크바 공격을 시작하는데,

드디어 유명한 탱크 T34 가 모습을 드러내지."

 

"앗!

2차 대전때의 아주 유명한 탱크 아닙니까?

6.25 전쟁에서도 사용되었구요?"

 

"그렇지.

6.25 때 미국 셔먼경전차와 붙어서 셔면의 공격에 끄덕없이 역습을 가해서 박살을 냈었지.

그 이후,

미국이 퍼싱 중전차를 투입했을 때에도 앞서 미국 전차에 승리했다는 생각으로 덤벼들다가 그대로 퍼싱의 공격에 박살나버리기도 했었다.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사를 보면 꼭 저런 T34 등의 막강한 탱크 때문에 이겼다느니 하는데,

어쨌던,

독일군이 처음 저 T34를 노획하자마자 바로 적의 무기에 대한 테스트를 했었다.

경사장갑을 채용한 T34 는 당시 독일군 대부분의 탱크포탄을 튕겨냈었고,

프랑스 전역의 '아리스' 전투에서 영국 마틸다 탱크와의 싸움에서 롬멜이 활용했었던 유명한 '88mm' 대공포 정도가 뚫을 수 있었지.

또한,

초기 독일 탱크들은 T34의 경사장갑을 채용하지 않았었지만,

T34 의 영향으로 후기의 탱크들은 경사장갑을 채용하게 된다.

저런 것들이 나중에 '괴티히스 티거' 류의 괴물 탱크들이 탄생되는 과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런 것들이 무적이라는 것은 아니야!

앞에서도 말했던 '퍼싱' 전차는 독일의 저 '괴니히스 티거' 를 목표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실제로 77톤이나 나간다는 '괴니히스 티거' 도 격파했었으니,

6.25 때의 T34 정도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었지."

 

"앗!

그렇다면 궁극의 무기는 없었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전술이나 무기는 바로 대응책이 나오기 때문에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궁극의 전술이나 무기는 없었다.

때문에 저런 전술이나 무기에서 2차 세계대전의 승패원인을 찾는 시도를 하는 것은 계속 말도안되는 오류를 일으키는 것이야.

어떤 사람들은 T34는 경사장갑을 채용했는데 독일 탱크는 수직장갑을 채용해서 졌다고 하기도 하는데,

독일 탱크들도 후기로 가면 경사장갑을 채용했었고,

어떤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은 전술을 전쟁의 승패 원인으로 그럴듯하게 설명하는데,

그 전술은 그 전투에서만 결정적이었을 뿐,

그 다음에 사용할 때에는 궤멸적인 결과를 가져왔었지.

대표적인게 '발지대전투' 에서 독일군이 전쟁초기의 '전격전' 을 미군과 영국군을 향해서 사용했다가 궤멸되어버린 것이 되겠지.

 

여하튼,

히틀러의 '바르바로사' 작전은 최초의 3개 목표,

즉, 레닌그라드는 완전히 포위했으므로 거의 성공,

모스크바는 수 십km 앞까지 갔으므로 거의 성공,

광활한 곡창지대, 유전지대, 자원의 보고인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는 점령을 하고서도 훨씬 전진했으므로 대성공!

 

저렇게 바르바로사 작전은 90% 이상의 목표를 달성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끝이 났지만 결국 '히틀러의 실수' 때문에 독일 패망의 원인이 된다."


팍스넷 프리차트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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