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정표의古戰과實戰投資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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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희생해 적을 안심시켜라!

兵法36計中第34計 고육계(苦肉計) [쓸 고(苦). 고기 육(肉). 꾀 계(計)]이니,

내 육신을 괴롭히어 이를 얻으라는 계략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 조조(曹操)가 오(吳)를 침공(侵攻)했을 때,

조조군은 대군(大軍)인데 비해 오(吳)의 손권군(孫權軍)은 열세(劣勢)였다.

오(吳)는 조조군의 배들을 태워 없애는 작전으로 나갔으나 배에 근접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장군의 한사람인 황개(黃蓋)를 군율(軍律)을 어겼다는 죄로 매질을 한 후,

감옥에 가두었다가 밤중에 도망치게 해서 조조에게 항복하게 했다.

조조는 이런 계략도 모르고 황개를 영접하고 그를 믿었다.

그리고는 황개가 시키는 대로 배를 서로 묶는 연환계(連環計)에 말려들어

화공(火攻)에 의해 대패(大敗)를 당했다.

이것이야말로 황개의 고육책(苦肉策)이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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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三國時代) 적벽대전((赤壁大戰)이 시작되기 전의 어느 날,

무고한 죄로 참수된 위(魏)나라 장수 채모(蔡瑁)의 종제(從弟)이며

수군부장(水軍副將)인 채중(蔡中)·채화(蔡和) 두 형제는

조조(曹操)에게 원환을 갚기 위해 오(吳)나라로 투항해 왔다고 울면서 호소했다.

(吳)나라의 대도독 주유(周瑜)는 이들을 기꺼이 맞아들이면서도

그들이 첩자로 온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며칠 뒤,

오나라의 군사 작전 회의에서 모의에 능한 장수 황개(黃蓋)는 화평론을 고집하다가

드디어 주유의 비위를 거슬러 목을 베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앞으로 항복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는 자는 가차 없이 목을 베리라."

오왕 손권의 엄명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장수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중에는 감녕(甘寧)처럼 목숨을 걸고 그를 변호하는 등 모두가 입을 모아 그를 변호했기 때문에

마침내 감형되어 태형 백 대의 형에 처해졌다.

항개의 살가죽은 터져 유혈이 낭자하였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몸둥이가 진지에 있는 그의 막사로 옮겨졌을 때 그는 이미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를 문병간 부장 노숙(魯肅)은 참상을 보자 못해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며칠 후,

황개의 참모인 감택(闞澤)은 밀서를 갖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그 밀서에는 "부대를 이끌고 투항하겠다"고 쓰여 있었다.

물론 조조는 이를 의심했으나

그때 마침 채중·채화 형제의 보고서가 도착하여

황개의 밀서 내용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감택은 조조의 지시를 받고 진지로 돌아와서 황개와 은밀히 의논하여

"뱃머리에 파랑색 깃발을 단 배가 가까이 가면 우리 부대인 줄 아시오"라는

내용의 밀서를 다시 조조에게 보냈다.

드디어 결전의 때가 왔다.

오나라 군사는 수륙 양면에서 한구(漢口) 부근까지 진출, 돌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며칠 후, 화선대(火船隊)를 지휘하여 오나라 군사의 선두에 선 황개는 해가 지기를 기다려

조조에게 다음과 같은 밀서를 급히 보냈다.

"주유의 감시가 심해서 탈출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후방에서 식량선이 도착하여, 나에게 그 지휘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때를 이용하여 오늘밤 이경(二更)에 청룡기를 뱃머리에 달고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만재한 식량선과 강동에서 이름난 장수들의 목을 선물로 가지고 가겠으니 기쁘게 받아 주십시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주유의 전군은 전진을 개시했고,

오왕 손권이 이끄는 본진은 그 뒤를 따랐다.

때마침 달은 휘영청 밝았으나

강 위는 밤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고 동남풍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수군의 본진에 있으면서 달빛 아래 출렁이는 강상을 바라보고 있던 조조는 이윽고

약속대로 황개의 부대가 오는 것을 보고,

"과연 내 뜻대로 되는구나." 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만약 황개의 배가 식량을 실었다면 흘수(吃水:배가 수면에 뜨는 정도)가 깊이 잠겨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 얕고 그 속력이 너무 빨랐다.

"멈춰라!" 하고 조조가 명령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바람을 타고 불을 뿜는 선단은 성난 파도처럼 수상 요새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그때 조조의 배는 쇠줄로 연결되어 있어서 미처 피할 수가 없었다.

불길은 삽시간에 다른 배로 옮겨 붙어 막을 길이 없었다.

이런 대혼란 속에 주유의 수군이 돌격해 왔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조조의 눈에는 육상과 해상을 막론하고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측근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도망을 갈 수는 있었으나 처참한 참패였다.

이리하여

조조의 천하 재패의 대야망은 한 가닥 꿈이 되어 강상에 짙게 깔린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황개의 고육계가 대성공을 거두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배를 연결하는 책략을 펼친 것을 '連環計(연환계)'라 하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제35계 연환계'에서 하도록 하겠다.

<제35連環計(연환계)편은 다음 주(週)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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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註)

▶조조(曹操, 155년 ~ 220년 1월 23일)는 중국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자는 맹덕(孟德)이며,

훗날 위가 건국된 이후 추증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조조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자 역신(逆臣)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삼국지연의》에 의해 권모술수에 능한 악인으로 저평가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시대를 선도한 영웅이라는 재평가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주유(周瑜, 175년~210년)는 중국의 후한 말시대의 무장이다.

양주 여강군 서현 사람이다.

자는 공근(公瑾)이며, 외모가 수려하여 미주랑(美周郞)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오의 손책(孫策)과 손권(孫權)의 휘하에서 제독을 역임했으며 사적으로는 손책의 친구이다.

▶채모(蔡瑁, ? ~ ?)는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덕규(德珪)이며 형주(荊州) 양양군(襄陽郡) 사람이다.

▶황개(黃蓋, ? ~ ?)는 오나라 최고참 장수 4인(정보, 황개, 한당, 조무) 중 하나로,

자는 공복(公覆)이며 영릉군 천릉현 사람이다.

▶노숙(魯肅, 172년 ~ 217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세력가인 손권(孫權)의 참모이다.

자는 자경(子敬)이다. 양주 임회(臨淮)군 동성(東城)현 사람이다.

▶감택(闞澤, ? ~ 243년)은 중국 삼국시대 오(吳) 왕조의 문신이다.

자는 덕윤(德潤)이고 회계(會稽) 산음(山陰)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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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의 손실 없이 적을 이기는 것보다 더한 상책(上策)은 없다.

그러나 쉬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소(多少)의 희생(犧牲)을 치르더라도

고육책(苦肉策)의 작전을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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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의 향상된 발전과 성공투자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