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정표의古戰과實戰投資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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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척 하되 미친 척은 하지 말라!

兵法36計中第27計가치불전(仮痴不癲)[거짓. 어리석을. 아니/. 미칠]이니,

어리석은 척은 하되 미치지는 말라는 말이다.

중국(中國)의 삼국시대(三國時代220~280년). 위(魏)나라의 원로(元老)인 중달(仲達)은

명문(名門) 조상(曹爽)에게 잘못 보여 실권(實權)도 없는 지위에 머물렀다.

그는 한때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중달의 행동을 수상이 여긴 조상은 부하에게 “병문안을 가서 살펴오라”고 하였다.

가보니 중달은 의복을 흐트러트리고, 죽을 흘리고, 정신이 나간 것같이 행동했다.

이것을 본 부하들은 정말 정신이 나간 것으로 알고 조상에게 그렇게 보고했다.

그렇게 해서 방심하게 해놓은 중달은

어느 날 정변(政變)을 일으켜 실권을 잡았다는 고사(故事)에서 유래(由來)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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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三國時代), 사마의(司馬懿:179~251년)는 위(魏)나라의 대신이자 진(晉)나라 선제(宣帝).

자(字)는 중달(仲達). 하내(河內,지금의 하남성 부근)사람이며

신체적 특징으로 낭고상(狼顧相)이라 하여

몸을 돌리지 않고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엄청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는 후한(後漢) 말기의 천하대란(天下大亂)이 한창이던 시점의 세상에 태어나

군웅이 각지를 할거 하고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그는 자랐다.

젊은 나이에 이미 사마의는 원대한 야망(野望)을 품었다.

당대의 명사였던 양준(楊俊)은 그를 가리켜 ‘보통 그릇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그는 유비(劉備)나 제갈공명(諸葛孔明), 손권(孫權)이나 주유(周瑜)보다 늦게 세상에 나타났지만

일대의 효웅(梟雄)이라고 자처하는 조조(曺操;155-220)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후한의 건안(建安) 6년(서기 201년)은 사마의가 스무 두 살의 나이로

그의 원대한 사업을 이루기 위해 당당하게 첫발을 내디딘 해였다.

이때 조조는 북방에 웅거하고 있던 강대한 적수인 원소(袁紹)의 세력을 관도(官渡)에서 크게 이기고

중국의 북방을 통일한 후, 천자(天子)를 옆에 끼고 각지의 제후들을 호령하던 시기였다.

조조는 청년 사마의의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초청하였다.

사마의는 처음에 조조의 밑에서 천하사(天下事)를 도모(圖謀)하기 이전에

천하의 정세(政勢)를 좀 더 관망하고 싶었다.

그는 조조의 사신(使臣)을 맞이한 자리에서 완곡하게 거절을 할 수가 없어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못함을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거짓은 곧바로 조조에게 탄로가 났다.

조조는 사신을 통해 ‘만일 따르지 않는다면 군사를 보내 체포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사마의는 마지못해 허창(許昌)으로 근거지를 옮겨서 조조의 부하가 되었다.

사마의는 이때부터 조조의 밑에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모(智謀)가 뛰어나고 담력과 기개가 당당하여 조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일찌기 조조는 그의 아들인 조비(曺丕)에게

“사마의는 신하에 만족할 위인이 아니므로 항시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조조가 언제라도 사마의를 죽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아들이나 자손에게 그를 항상 조심하다가 때가되면 죽이라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마의는 다행히 조조의 아들인 조비와 사이가 매우 좋았다.

후에 허깨비에 불과한 한(漢)의 황실을 대신하여

위(魏)나라를 세운 위문제(魏文帝;220-226) 조비(曺丕)는 조조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마의를 그의 가장 중요한 대신으로 삼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더욱이 조비는 임종(臨終)을 맞을 때,

그의 아들인 위명제(魏明帝;226-239) 조학(曺壑)을 사마의에게 부탁하면서,

종실(宗室)인 조진(曺眞)과 함께 국정을 맡아 달라는 유조(遺詔)를 내렸다.

이로 인해 사마의의 권력은 더욱 공고화 되었고, 그의 지위는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위(魏)나라의 국정이 튼튼해질수록 사마의의 원대한 꿈은

그것과 반비례하여 점점 무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잘못하면 그는 위(魏)나라의 신하로 일생을 마쳐야 하는 사태가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 司馬懿(사마의).

將帥之才奸雄之志(장수지재간웅지지)

得政專權見利忘義(득정전권견리망의)

"장수의 재능을 가지고 있으나 간웅의 뜻을 가지고 있어,

정치의 전권을 얻어 이익을 보면 의를 저버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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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마의는 끝내 그 기회를 잡았다. 위(魏)나라 경초(景初) 2년(서기 238년),

태위(太尉) 사마의는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요동(遼東)의 세력을 정벌(政伐)하러 출정(出征)하였다.

이듬해에 이르러 요동을 평정한 그는 위의 수도인 낙양(洛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3일 동안 명제(明帝) 조학(曺壑)으로부터 다섯 통의 친필 밀서를 받았다.

“짐의 생사가 경각에 달려 있으니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궁으로 돌아오시오.”

사마의는 가장 빠른 말을 타고 밤낮으로 무려 4백여 리의 먼 길을 단숨에 달려,

이튿날 낙양에 도착했다.

몸의 먼지를 털 사이도 없이 황궁으로 들어간 사마의는 명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숨이 오락가락한 명제는 힘겹게 눈을 뜨고

아버지처럼 따르던 그의 손목을 잡아끌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明帝] “죽음을 참기도 힘이 듭니다. 장군을 보고 죽게 되니 이제는 여한이 없습니다.”

사마의는 감동하여 그의 머리맡에서 굵은 눈물을 떨구었다.

명제는 곁에 부복하고 있는 위폐제(魏廢帝;239-254) 조방(曺芳)을 가리키며 사마의에게 말했다.

[明帝] “후일을 부탁합니다.”

명제는 조방을 일으켜 세우고 사마의에게 조부의 예를 올리게 하였다.

이때 조방은 나이 겨우 아홉 살이었다.

명제 조학은 국정(國政)을 사마의와

조씨(曺氏)의 종실(宗室)인 조상(曺爽;?-249)에게 위임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씨 삼대, 다시 말해 조조와 조비, 조학은 대대로 내려가면서

지력(智力)과 판단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끝내는 외척과 권신(權臣)의 발호를 막지 못했다.

조상은 종실이며 대신이었던 조진(曹眞)의 아들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호랑이였고 그는 고양이 축에도 끼지 못했다.

호부견자(虎父犬子)라고나 할까.

조진은 용감하고 의연하면서도 침착하며 사리가 깊었다.

하지만 조상은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겉으로는 호기방자한 반면에 속으로는 유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한 조상의 성격으로는 사마의의 야망을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두 명의 보정대신(輔政大臣)중에서 사마의는 조상보다 훨씬 연장자였다.

조상은 비록 종실이었지만 사마의를 항상 어른처럼 존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간과 능력을 비교한다면 조상은 사마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종실이라는 혈통 때문에 지위는 오히려 사마의보다 높았다.

위폐제 조방이 즉위한 후, 두 사람 사이에는 아주 빠르게 모순(矛盾)이 폭발했다.

사마의의 앞에 가면 조상은 왠지 모르게 압박감을 느꼈다.

사마의는 어쨋든 지위가 높은 조상에게 겸양(謙讓)을 다했지만,

그의 겸양에는 우월감(優越感)과 자신감(自信感)이 충만(充滿)하였다.

조상은 사마의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그의 권력을 누르기 위해,

서서히 측근인 하안(何晏), 이승(李勝), 정밀(丁謐), 필궤(畢軌)를 중용하여

주요한 관직에 배치하고 정사(政事)에 참여시켰다.

조상의 측근인 그들은 도성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문사(文士)들로,

풍도가 우아하고, 행동거지가 예의바르며, 언변이 뛰어났다.

하안(何晏)의 경우에는 당대의 석학으로 매우 뛰어난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학식과 덕망은 훌륭하였지만 실제로 정치적(政治的)인 재간은 부족하였다.

사실 권력자가 명성이 훌륭한 학자를 초청하여 관리로 등용하는 진정한 목적은

그들의 정치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고

자신의 기반과 세력을 외부에 알려 힘을 과시하려는데 있었다.

조상은 오히려 이러한 정치상의 상식을 깨닫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멸망을 촉진하는 사태를 범하고 말았다.

하안과 그의 일당은 자신들이 도저히 사마의의 재간과 능력을 당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다른 방법으로 그를 정치에서 배제하는 수단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조상(曺爽)을 통해 황제에게 주청(奏請)을 하여

사마의를 관직은 높으나 실권이 없는 태부(太傅)로 좌천(左遷)시켰다.

이후로 조상은 조정의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기관인 상서성(尙書省)에 명령하여

모든 사안을 직접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또한 조상은 하안과 유창을 상서(尙書)에 임명하여 조정의 권력을 완벽하게 장악하였다.

<27-2편은 다음 주(週)에 계속>

주(註)

삼국시대(三國時代220~280년): 중국(中國)에서 위(魏)·오(吳)·촉(蜀)의 삼국이

천하를 삼분하여 분립하였던 약 40년간의 시대이다.

삼국시대는 후한이 몰락하는 2세기 말부터 위, 촉, 오가 세워져

서로 다투다가 서진(西晉)이 중국을 통일하는 3세기 후반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황건의 난(黃巾之亂)을 시작으로 한(漢)의 천하가 무너지고

대륙의 군웅들이 지모와 무용을 다해 싸우던 시기로

조조, 유비, 손권이 솥발처럼 천하를 나눈 전란의 시기였다.

제갈량(諸葛亮)의 북벌을 막아낸 사마의(司馬懿)의 손자인 사마염(司馬炎)에 이르러

진((晉)나라가 천하를 통일한다.

사마의(司馬懿,179년~251년) :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의 정치가이자 군략가이며,

그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진((晉)나라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자(字)는 중달(仲達)이며,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선황제(宣皇帝)이다.

서진(西晉, 265년 - 317년)은 중국의 왕조이다.

촉한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 위나라의 중신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건국했다.

건국 초기 무제 사마염은 안정적인 정치로 새로운 나라의 기반을 다져나갔으나,

말년에 사치에 빠져 온 나라가 향락의 도가니에 빠지고 말았다.

국장의 문란이 더해가던 혜제(惠帝)때에 이르러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8왕들이 난을 일으켰다.

팔왕의 난[八王之亂:

중국 서진(西晉)의 제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황족들의 대결이 내란으로 번진 것을 말한다.

사마씨(司馬氏)의 왕족들인

사마(량,위,륜,경,애,영,옹,월)

司馬(亮,瑋,倫,冏,乂,穎,顒,越)들이 내란을 일으켜 국운이 기우고 만다.

무려 16년 동안 팔왕의 난이 중국을 휩쓸고 있던 중에,

중국 내륙에 이미 정착해있던 많은 유목민족(遊牧民族)들이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영가의 난(永嘉之亂)을 초래하게 되었고

서진은 흉노의 족장(族長) 유연(劉淵)이 세운 한(漢)나라에 건국 52년 만에 멸망했다.

(유연의5대째, 유요(劉曜)가 319년에 국호을 한(漢)에서 조(趙)로 변경하였다.)

영가의 난(永嘉之亂)은 중국 서진말기에 이민족에 의해 일어난 반란을 가리키는 말이다.

회제(懐帝)의 연호였던 영가(永嘉 307년~312년)때 일어났기에 그렇게 부르고 있다.

종실(宗室): 왕의 친족(親族)을 가리키는 말로 종친(宗親)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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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의 향상된 발전과 성공투자(成功投資)를 빕니다.-